1세기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최상의 시기였다. 사도들이 주변에서 인도하고 성령의 능력과 임재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충만한 기쁨과 평화, 그리고 일치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면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울이 교회와 복음을 방어하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바울은 다른 일은 물론 유달리 자신이 관여한 문제엔 끝까지 책임을 갖고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될 때가지 노력하고 협력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는 남들이 어찌한들 소신껏 자기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간직한 사도직, 지식, 가르침, 예언 모든 것을 사용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사람을 구원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그것이 그의 벼리였다. 유대의 지도자, 교회들로 부터 언제나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불평대신 만족과 넘치는 자신감으로 살았다.

      바울의 목회 발령지는 아라비아 광야였다. 밀어붙이는 힘에 눌리어 밀렸다. 교회 조직도 없는 곳에 파견되었다. 교회가 그를 부르지 않았고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흔한 줄 하나 닿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바울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름 없이 일했다. 자신을 증명하는데 여러 해가 지나갔지만 초지일관 전도자의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드디어 교회가 그에게 안수하고 번째 선교 여행을 보냈다. 그렇지만 심각한 방해와 반대를 끊임없이 견디어야 했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다시 일어나야 했다. 남을 탓하거나 자신을 원망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확신과 사명을 높일 뿐이었다. 모든 환경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소명에 충성할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1: 24) 돌리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한국의 친구 헐버트 선교사의 말이다. 우리나라 YMCA 초대회장,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밀사가 되어 이준 등과 함께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송되었다. 헐버트는 스위스, 프랑스 등지에서 언론인들과 접촉하면서 한국을 위해 홍보와 변호에 최선을 다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한국에서 추방당했으나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크를 국빈으로 초대한다. 그 때 나이 84세. 그는 아무리 여행이 위험하다 해도 광복된 한국과 그의 선교지를 보고 싶어 억지로 왔다가 결국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부정적인 사고의 틀을 바꾸려면 약 1톤 정도의 긍정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한다. 무명, 무관(無冠)이면 어떠랴! 피로사신 교회와 선교지를 잊고, 복음전파를 멈출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