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가 되는 이유(칼럼 2)

  사할린에서 11년전 알고 지내던 장로교회 선교사를 인터넷에서 우연히 만났다. 한글학교 자원 봉사자로 교회를 개척하고 있던 나와 동료들에게 “이곳에는 안식일 교회가 없으니 우리교회 와서 좀 도와달라”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직 러시아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 궁금해져서 이것저것을 알아보니 사할린을 거쳐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리스크에서 선교사로서 사역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길고도 먼 길을 돌아서 왔는데 그는 이 러시아에 터를 잡고 물귀신처럼 11년을 살아온 것이었다.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의 결론에 이를 때쯤 문득 한두 가지의 질문이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너는 왜 선교사가 되어 이곳에 있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위해 선교의 일을 하고 있는가?

  어느 분은 월급을 잘 모아서 귀국하라고 한다. 어느 교인은 지금처럼 퍼주다보면 노년에 후회할 것이라고 말한다. 돈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모든 선교사들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돈 때문에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 개척교회에서 교회 짓고 헌당하자마자 러시아로 와서 다시 교회 건축을 시작한 내게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명예를 위하여 선교의 일을 하는가? 한국에 있으면 받게 될 목사로서의 최소한의 존경과 대접은 때로 이국에서 혼자 고군분투해야하는 선교사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물론 선교사이기 때문에 받는 존경과 유익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선교지에서 진한 외로움과 때로는 러시아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의 오해와 질시를 받으며 거리에서는 경찰에 붙잡혀 죄인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닐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면 외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인가? 10년 전 이미 사할린에서 선교사의 쓴 맛을 한번 톡톡히 경험한 내게 선교사 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없다. 오죽하면 연애할 때부터 러시아에 선교사로 간다고 약속하고 결혼한 아내가 들은바보다는 살만하다는 말을 할까?  

  그러면 왜 7개월 된 갓난 아기와 어린 둘 딸을 안고 질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떨던 이 추운 동토의 땅, 러시아에 선교사로 돌아왔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위해 선교의 일을 하는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 심호흡이라도 할라치면 병후유증으로 아릿하게 저려오는 옆구리, 주립 병원의 자작나무아래서 눈물로 탄원하던 생생한 기도소리는 적어도 내게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잊을 수 없는 선교사로서의 고뇌와 지울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돌아왔다고 하면 너무 쉬운 대답이 될까? 어쩌면 10년 전 필리핀에서 말라리아로 고생하던 한 젊은 선교사가 다시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로 돌아간 심정도 마찬가지리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선교사가 되었다”는 데이빗 리빙스톤의 고백이 아닐지라도 딱히 사랑이 아니고는 선교사가 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선교의 열매는 선교사의 눈물과 사랑의 결과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랑이 없는 선교는 죽음이며 사랑이 없는 선교사는 절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활동적일지 모르고 또한 많은 사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그러한 종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가운데 없을 것 같으면 우리는 하늘 가족의 일원이라고 인정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실물교훈 158)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