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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안식일 - 관계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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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8).

유치원에 다니는 연서는 짝꿍인 현준이의 편지를 받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용은 우리 빨리 커서 결혼하자는 일종의 청혼 편지였습니다. 며칠 고민 끝에 연서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썼습니다. “현준아! 아쉽지만 우리는 결혼할 수 없어. 봐라,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하고,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하고, 고모부는 고모랑 결혼하고, 외삼촌은 외숙모랑 결혼하고…. 지금까지 우리 집은 집안 식구들끼리만 결혼을 했거든. 그런데 너랑 나랑은 가족이 아니잖아!” 결혼이 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여섯 살짜리 연서가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복음 밖에 있었던 외인들이었습니다(엡 2:12, 13).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들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친자이고 하나는 양자입니다.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혹자는 왜 우리를 친자가 아니고 양자라고 했을까 섭섭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큰 은혜입니다. 충주에서 목회하시던 어떤 목사님이 삼 십리쯤 떨어진 이웃 교회로부터 집회 초청을 받았는데 목사님의 개가 어떻게 알고 주인을 따라 그곳까지 왔더랍니다. 그날 저녁 그곳에서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새끼는 간데없고 어미 개만 지쳐서 누워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어미가 밤새도록 여섯 마리 새끼들을 한 마리씩 입에 물어 충주집까지 날라 놓고는 지쳐서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눈물겨운 본능적 사랑은 짐승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를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은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배 아파 낳은 자식과 거저 얻은 양자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제일 먼저 자신의 옷을 벗어 탕자에게 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다시 새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반지를 끼워 주고,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겉옷은 칭의를 상징합니다. 목욕은 침례이고, 신발은 자유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가락지는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지만 다시 가락지를 끼워 줌으로 다시 상속을 약속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가리켜 “아들이 되는 권세”(요 1:12)라고 표현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그것이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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