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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화요일 - 우리의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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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마리아인은…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눅 10:33, 34).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본받고 싶은 신앙인의 역할 모델 역시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당시에 최고의 지성인이며 만인이 부러워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심지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조차 율법의 신성성을 오도하고 있었다. 율법 준수는 그들의 신앙의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뿐 아니라 구원의 척도였다. 소위 율법 전문가들인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율법 자체가 되시는 예수를 율법의 준수 여부로 시험하고자 했다. 그것도 구원이라는 인생의 보편적인 질문으로 예수께 다가왔다. 질병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제사장들과 율법의 신성성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서기관들은 수많은 병자를 동정하고 치료하시는 예수의 행위가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확신했다. 예수께서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했을 때 그들은 서슴없이 “선을 베푼 자”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마리아인”이 선한 일을 했다고 언급했으나 그들은 선을 행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시인할 수 없었다. 선행에서조차 그들은 인종적 편견이 있었으며, 구원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민족만이 해당한다는 제한적이고도 배타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다.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사경에 놓인 그 사람이 유대인일 수 있음에도 그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율법을 이루는 것과 관련짓지 않았다. “그들은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외인이요 원수들이었다. 그러나 자국민들과 상이한 사회의 계층 사이에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가? 제사장과 랍비와 장로는 누구를 이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를 순결하게 하려고 끊임없는 예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무식하고 부주의한 군중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될 터인바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그들은 ‘부정한 자’들을 이웃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인가?”(소망, 498). 우리도 동일한 우를 범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우리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만이 남은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는 보편적 선행 의무를 등한히 여긴다면 유대인들처럼 책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복음은 이웃과 나눌 때 그 자체가 진정한 기쁨이 된다. 선행은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구원받을 자의 의무임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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