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일본집 대부분은 목조건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조건물하면 큰 환상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겨울에는 목조건물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추위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처럼 온돌마루로 이뤄진 집에서 살지 않는다. 대부분 목조건물이고 방바닥도 다 나무마루바닥으로 돼 있다.  이번 신대원 코후교회 선교팀이 일본선교체험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느낀 것은 바로 추위다. 대부분은 목조건물로 이뤄진 일본 집은 단열시스템이 거의 돼 있지 않다. 단열이 돼 있지 않으니 방음또한 거의 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확실히 느낀 일본체험이 아닐까 싶다.

전날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사모님이 주신 유탄포를 활용하지 못한 것은 큰 화근이다. 유탄포는 고무주머니로 뜨거운 물을 넣어 온도를 뜨겁게 유지해주는 한 마디로 물주머니이다. 사실 일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사모님이 왜 이런 유탄포를 주셨는지 알 길이 없었다. 사모님이 말씀해주신 "이 유탄포에 뜨거운 물을 넣어 발 사이에 끼고 주무세요"라는 말에 주의깊에 들은 대원도 없었던 것이다.

밤에 자는데 너무 추워서 잠을 깼다. 전날 감기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던 나는 어깨와 목 부분에 유탄포를 베다시피 해서 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우리를 위 방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두겹을 깔아주셨고, 요도 두껍고 따뜻한 것으로 두개씩 덮고 자도록 배려해 주셨다. 개인당 말이다. 그런데도 추웠다.!! 이것은 마치 군대입대 후 훈련소에서 한 겨울에 숙영훈련을 하다 새벽에 한숨도 못 자고 덜덜 떨만큼이나 추웠다.  추워서 덜덜 떨며 잠을 청하려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 도저히 잠을 들수가 없었다. 추워서 덜덜 떨 뿐이었다. 자기 전에 방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려고 켜 뒀던 난로를 키려고 일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이불을 걷고 걸어가 난로를 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방바닥만 추운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냉기가 몸으로 들어오는데 견디기 힘들었다.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니 다들 잠을 잘 못 잔 얼굴이나 그래도 간신히 누군가 일어나 난로를 폈고, 그 기운에 이불 속에서 하나하나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서로 씻는 것을 미뤘다. 형이 먼저 씻어라. 네가 먼저 씻어라 하는 등 서로 미루다. 아침 6:30이 다가왔다.

아침 6시 30분은 요시히로상과 치까코 상 그리고 사모님과 함께 말씀묵상을 하기로 한 시간이다. 요시히로 상과 치까코 상은 교회에서 수요일까지 함께 잠을 자며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우리는 말씀 묵상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약속을 칼같이 지킨다는 선입견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리에 들어섰다. 밝히지 않겠지만 머리를 감지도 않은 채로 말씀묵상에 참석한 대원도 있었다. 이 대원은 내가 기억하기로 하루 빼고 다 머리를 감지 않고 말씀묵상에 참석했다. 하루종일 감지 않은 때도 있었는데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는 샤기컷 혹은 일명 폭탄머리 같다며 오히려 일본청년들과 목사님 사모님은 즐거워 했다.

선교체험기간 내내 우리는 사도행전을 묵상하기로 했다. 말씀묵상 첫날이기에 우리는 사도행전 1장을 묵상했다. 다들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고 많은 것을 나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각자 깊이 있는 견해를 내 놓았다. 우리는 서로의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했다.
 
아침묵상을 하며 인상 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오차'이다. 일본인들은 언제나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오차를 즐기는데 오차란 특별한 차 이름이 아니라 항상 먹는 차들을 일컬어 오차라 부른다. 아침에 일어나 이 오차를 먹으면 몸이 따뜻해 견딜만 했다. 오차는 아침에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식사 전 식사 후, 시시 때때로 먹는다. 일본선교체험이 끝날 무렵에는 이 오차란 녀석과 친숙해져 계속 따뜻한 물을 먹게 됐다. 생각해보니 거의 마시는 물의 양이 하루에 9~10잔 정도 되지 않는가 싶다. 말 그래도 뉴스타트 생활이다.

말씀묵상 후 기도를 했다. 기도내용은 그날 있을 스케줄과 함께 일본 코후교회의 선교내용이었다.
식사시간이 되었다. 말씀묵상후 사모님과 치까코 상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요시히로 상에게 일본어를 배웠다. 우리는 간단한 일본말부터 자기소개까지 이것저것 물어봤다. "와타시와 나마에노 신승렬 데스" "난데스까?"  등을 배운 것으로 기억한다. 요시히로상은 영어를 잘해 영어로 설명했다. 다행히 우리는 대원 하나를 빼고는 대부분 영어에 익숙한 지라 서로 배우고 싶은 것을 물어가며 하나하나 익혔다. 미리 영어를 잘 하는 청년을 준비해 준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아침은 언제나 푸짐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본 전통된장국을 끓여준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된장찌게보다 옅고 맛이 조금 약하다. 미소라 불리는 이 된장은 한국인들처럼 짜게 혹은 너무 강하게 먹지 않는 것 같아 건강에 좀 더 좋지 않는가 생각된다. 여기다 사모님은 각종 야채를 많이 넣어 국을 참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이 날 아침부터는 어제까지 줬던 수저를 주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수저없이 밥을 먹기 때문에 우리는 젓가락을 이용해 국을 마시다시피 먹었다.

식사를 할 때마다 인상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재훈이다. 이제 겨우 5살이 된 재훈이는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는 목사님의 아들이다. 이녀석은 한국말과 일본말을 둘 다 유창하게 잘한다. 그래서 일본 청년들하고는 일본말을 우리하고는 한국 말을 사용했다. 부러운 언어실력이다. 재훈이는 식사때마다 꼭 젓가락을 자신의 손으로 손수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누가 도와줄라 치면 자신이 하겠다고 가끔은 소리까지 친다. 재훈이의 영역인 것이다. 젓가락뿐만 아니라 그릇또한 직접 하나하나 정리한다. 개인 당 한개씩 말이다. 심지어는 식사 후 디저트로 주는 일본 과자들도 재훈이가 직접 나눠준다. 아마도 선교사의 삶을 살고 계시는 목사님과 사모님의 생활이 재훈이에게 그대로 밴 것이 아닌가 싶다. 나눠주는 삶을 재훈이도 어느새 몸으로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을 때 사토우상과 오오마에상이 어느새 합류를 했다. 일본 휴일이라 오오마에상이 함께 하기로 한것이다. 아쉽게도 샤리상은 안식일에 쉬는 관계로 휴일인 당일에도 함께 가지 못했다. 우리는 전날 이야기하던 관광(?) 혹은 주변 사전답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아침을 먹고 두명씩 설겆이 조를 짠 우리는 설겆이와 식사 후 정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아프고 오한이 오던 나는 지현이에게 화장실을 갔다고 하라고 말하고는 숙소에 가서 누었다. 계속 웃으면서 참여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침부터 머리가 너무 아프고 정신이 혼미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몸이 참 안 좋았다. 자리에 누워 있으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선교를 위해 교회에 왔는데 폐가 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주기 보다는 받고만 있는데 이렇게 폐를 끼치는 것이 너무 싫었다.

한숨을 자니 괘찮은 듯 느껴졌다. 그러나 여전히 오한은 오고 머리는 아팠고 열은 났다.

우리가 간 곳은 사전답사라기 보다 관광이다. 우리는 일본에서 유명한 아이스크림 및 과자 공장으로 갔다. 사모님은 말 수가 적은 오오마에상과 사토우상 그리고 지현이와 용훈형을 한 차에 태웠다. 몸이 안 좋으니 이동하면서 차에서 푹 자라는 배려였다. 

정신없이 자는데 눈을 뜨니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어느 산으로 이동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아이스크림공장이었다. 일본은 아이스크림 공장을 공개해 견학을 할 수 있도록 공장을 개방한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본 사람들은 믿고 안심하고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먹을 수 있다고. 견학을 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에 대해 탄복을 할 수 밖에 없다. 정말 깔끔하고 깨끗하며 정직하게 식품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은 옆에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면서 일본인들은 하나를 만들어도 정직하고 분명하게 혼신을 다해 만든다고 말씀해 주셨다. 일본인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어느새 녹아들고 있었다. 이미 코후교회의 성도들님이 보여주신 친절에 감복하고 있던 우리는 이런 정직한 식품관리에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견학이 끝날 무렵 눈 앞에 아이스크림 시식코너가 펼쳐졌다. 정말 무료라고 물어보니 무료란다. 갑자기 대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침에만 해도 춥다고 엄살을 피던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소식을 한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눈치를 봐가며 하나만 먹던 사람들이 계속 먹어도 된다는 말에 두개 세개 심지어 네개를 먹는 사람이 있었다. 단연 많이 먹은 사람은 홍상. 기삼이형이었다. 홍기삼 형은 일본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날 일본 청년들은 홍상이 아이스크림을 네개나 먹었다며 두고두고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10개를 먹어도 화제거리가 아닐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게 서로 몇개를 먹었냐며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나만 하나도 먹지 않았다. 몸살이 제대로 걸린 탓에 살이 떨릴 정도여서 사실 아침 먹은 것도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고 조금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일부러 하나도 먹지 않고 있는데 아픈 것을 이미 다 눈치챘는지 불쌍하다며 청년들이 과자시식코너에서 맛있는 과자조각들을 가져왔다. 심지어 새끼 붕어빵들이 들어있는 과자 상자를 사서 건네줬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과자들을 조금씩 먹었다. 새끼붕어빵은 도저히 먹지 못하고 주머니에 조용히 넣었다. 그들의 배려에 참으로 고마웠다.

또 다시 차에 탔다. 이번에는 요시히로 상과 치까꼬 상  집으로 향했다. 또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또 다시 눈세상이 펼쳐졌다. 눈이 새하얕게 내리는데 정말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놀라운 것은 도로가 다 눈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꺼리김 없이 오오마에 상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알고보니 일본인들은 겨울에 다 스노우타이어를 차에 장착해 달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스노우타이어가 좋아도 온통 눈세상인데 미끄럼 없이 차가 달리는 것이 신기했다. 역시 일본인들은 차를 잘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나는 오오마에상에게 "구루마(일본말로 차) 스고이"라고 말했다. 못 알아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문법에 전혀 안 맞는 말을 했으니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한 듯 싶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 잠을 계속 잤지만 몸이 좋아지지 않았다. 계속 속으로 기도를 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픈 것을 티내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뭐 그렇게 심하게 아퍼 본 기억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아팠다. 정신이 혼미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의문이 들었다. 도데체 왜 낫지 않는 것일까? 기도가 부족한가? 하나님께서 내게 이곳까지 인도하셨다면 분명 당장이라도 낫게 해 주실 수 있을텐데 도데체 낫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사실 살면서 그렇게 아픈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도 기도는 간절했다. 거기다 교회에도 대원들에게도 짐이 되기 싫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곳까지 보내셨으면서 왜 아프게 하시는냐"며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결국 마음속으로 내일도 아프면 조기귀국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까지 하게 됐다.

한참을 달리고 보니 귀가 멍멍할 정도로 높은 산지에 올라왔다. 산속마을에 올라온 것이다. 멀리 미나미알프스라는 일본의 지붕이라는 산지가 보이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별장 같은 곳에 올라왔다. 요시히로 상은 아버지 집이 있는 이 산속 마을로 작년에 이사왔는데 시골이라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요시히로 상은 아버지 집 바로 앞에 치까꼬 상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요시히로 상 아버지의 성함은 후지타 마사키로 젊었을 때 암에 걸려 6개월 판정을 받은 분이었다. 그런데 일본 위생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던 중 우리교회에 대해 알게 되고 기별을 받아들여 시골에 들어와 건강식을 시작하셨단다. 6개월 판정을 받은 이 분은 약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고 계시다고. 집 근처에 큰 농장을 지어놓으시고 유기농으로 농사도 짓고 계셨다. 요시히로 상 어머니 유미코 상은 도쿄에서 채식식당을 경영하셨는데 대부분 재료는 이 마사키 상이 농사지으신 것으로 요시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마시키 상은 최근 몇년간 교회를 나오지 않으시다 요시히로 상이 도쿄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이사를 오자 함께 코후교회로 나오시기 시작하셨다.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자 1년간 연락이 끊긴 요시히로 상 동생이 연락 오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체험하시고 계신 분이라고 하셨다.

어쨌든 우리는 마사키 상 집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나무를 때우는 난로가 거실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또 탁자에는 '코타쯔'라는 난로가 데펴져 있었다. '코타쯔'는 일본의 특색있는 난로로 거실 한 가운데 탁자에 열을 내는 전구를 넣어 손님이나 사람들이 발을 탁자 밑에 넣게 해 몸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이다. 이 곳에 발을 한참을 넣고 있으면 몸이 따뜻해진다.

마사키 상은 우리들에게 손수 지으신 채소들을 넣은 야채 스프를 끓이셨다. 그러고는 우리들에게 대접했는데 맛이 아주 특별했다. 참 맛있었다. 부인이 요리사여서 그런지 마사키 상은 요리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앞집인 요시히로 상 집으로 가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했다.

점심식사 후 간호사인 치까코 상이 내게 온도계를 가져왔다. 계속 아퍼보이는 내가 안 쓰러우셨나 보다. 온도계를 한참을 대고 있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두고도 소리가 나지 않자 온도계를 빼고 보니 온도계의 수치는 "39.2도" 다들 깜짝 놀랐다. 

점심을 먹고 근처 온천을 가기로 계획했었지만 치까꼬 상이 나는 가면 안 되겠다고 말했다. 열이 나는데 열을 더 내는 온천을 가게 되면 더욱 악화 된다는 것이다. 순간 짐이 되기는 싫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나 때문에 다들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나를 마사키 상 집에서 잠시 쉬게 하고는 다녀온다는 것이다. 그런 내게 동료가 생겼다. 지현이다. 지현이도 전날 온천욕을 하며 땀을 너무 빼 힘들었다며 오늘은 쉬고 싶다고 말했다. 지현이와 는 함께 쉬기로 했다.

마사키상 집에서 쉬기로 한 우리는 '코타쯔'에 발을 넣고 한숨 자기로 했다. 솔직히 멀리 외국까지 와서 남의 집에 아프다는 핑계로 잠을 자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당장 눈치보고 할 것이 없었기에 코타쯔에 발을 넣고 마사키 상이 가져다 주는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잠들기 전 지현이에게 내일도 이렇게 아프면 한국에 조기입국을 생각해야하지 않겠냐며 낮동안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지현이는 더 지켜보자고 위로했다. 조용히 누운채로 기도했다. 제발 낫게 해달라고 말이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몸이 점점 더워지면서 땀이 났다. 그래도 정신없이 잠을 잤다. 일행이 돌아오고 나서 잠을 깼다. 잠을 깨고 보니 온 몸이 젖어 있었다. 머리가 아픈 것이 사라졌다. 정신이 맑아졌다. 속도 좋아졌다. 이상한 일이다. 코타쯔에 발을 넣고 잤더니 그것이 그만 '반신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감기가 멀쩡히 낫아 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낮동안 계속 기도할 때는 들어주시지 않더니 정말 생각지도 않던 방법으로 감기가 멀쩡히 나아버린 것이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낫았다고 말했더니 다들 기뻐했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청년들을 보니 너무 고마웠다. 전날까지 조심스럽던 행동이 갑자기 활기를 찾았다. 마사키 상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마사키 상은 땀을 많이 흘렸을테니 음료수를 마시라며 이온음료를 권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중에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내 몸이 많이 아픈 것과 또 쉽게 낫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됐다. 이유는 마사키 상을 위해서 였다. 마사키 상은 이제 막 교회를 다시 나오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사키 상이 내 몸 상태에 대해 계속 걱정했다는 것과 또 자신의 집에서 그 것도 자신때문에 내 몸이 회복됐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하며 감사해 했다고. 즉 하나님은 하나하나 사람들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준비된 시간을 갖고 계신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쉽게 낫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병이 쉽게 낫지 않음으로 그 분이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다시 한번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다시 코후교회로 돌아오면서 아까 먹지 못했던 새끼 붕어빵을 꺼내 먹었다. 얼마나 맛있던지 일본 아이스크림은 먹지 못했지만 아무도 먹지 못했던 새끼 붕어빵을 나혼자 독차지 한 것이다. 대원들에게 하나씩 줬지만 배부른지 나 먹으라며 양보했다.

교회로 돌아오니 목사님이 박종수 목사님과 함께 와 계셨다. 일본 목회자 협의회를 마치고 돌아오신 것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우리는 저녁예배를 드렸다. 박 목사님께서 말씀을 주셨는데 감사의 삶에 대한 내용이었다. 특별히 예화로 든 이야기는 '레나 마리아'였는데 팔이 없는데도 그녀는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것이었다. 목사님은 레나 마리아는 악조건 속에도 목사님 본인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산다며 회개를 많이 했다고 고백하셨다. 

예배 후에 우리는 레나 마리아의 동영상을 보며 서로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 감사한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다음날인 화요일은 신묘목사님이시라는 분이 오신다고 했다. 처음에 이분은 금요일에 집회를 하신다고 들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분이 집회하신다는 것은 일본 코후교회에 집회하러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대원생들에게 일본선교에 대한 비전과 말씀을 해주시기 오신다는 것이다. 조금은 감당이 되지 않는 말씀이셨다. 자꾸 '왜 코후교회는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큰 친절을 베푸시는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인가? 우리는 이 곳에 무언가 주러 왔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을 자꾸 뒤엎으셨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자꾸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새 일들을 보여주고 계셨다.

다시 잠자리에 들게 됐다. 전날 유탄포에 신경도 안쓰던 대원들이 이번에는 물을 많이 넣야 한다면서 물 넣는 일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날보다 유탄포에 물을 더 많이 채우고 내복을 껴입는 등 새벽의 강추위를 이기기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기 전 우리는 또 다시 선교계획에 수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의논하기 시작했다. 대장 이상은(우리는 일본에서 성 뒤에 상을 붙여가며 서로를 불렀다*^^*) 즉 이용훈 형은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온 계획을 조금은 해야하지 않겠냐며 우리가 오게 된 당위성은 선교하러 온 것이지 이렇게 교회에 부담주러 온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고 말했다. 

낮에 사모님과 함께 이야기 한 대화가 생각났다. 사모님과 대화를 하던 중 우리가 가진 부담에 대해 말씀드렸다. 너무 받기만 한다고. 우리는 무언가 해야 하며 무언가를 드리려고 온 것인데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받기만 한다며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었다. 사모님의 대답은 매우 놀라웠다. 정말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사모님은 그 것은 사람의 계획이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냐고. 걱정도 말고 부담도 말고 단지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주시는 사역을 열심히만 해주시라고 하셨다.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리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지금 청년들 하나하나가 다 기뻐하면서 서로 재밌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하나님의 사역인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성령하나님의 음성대로 하면 걱정할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순간 놀랐다. 사모님이 천사처럼 보였다. 말은 안했지만 정말 내가 찾는 사모의 이상형이다. 아니 굳이 사모라기 보다 목회의 이상형 아니 그리스도인 삶 그 자체가 아닌가? 우리는 너무 걱정만 하고 산다. 다 내 계획 내 생각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면 얼마나 행복한가? 인도하심대로 나아가면 얼마나 기쁜가? 짐도 없도 정말 항상 기뻐할 수 있지 않는가? 얼마나 은혜의 말씀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아닌가 말이다. 그 것을 몸소 삶으로 보이신 사모님의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고 닮고 싶었다. 

나중에 그런 사모님이 부러워 동생이 있냐고 물었더니 남동생만 있다고 하신다. 쩝. 사실 함께 간 세명의 대원들은 기혼자들이고 나만 아직 여자친구도 없는 솔로이기 때문이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항상 날 소개하면서 다른 세명의 대원들은 기혼자지만 나는 총각이라고 소개하셨다. 일본분들은 뭐가 그렇게 우스우신지 내 이야기만 들으시면 즐겁게 웃으셨다.

어찌 됐던 그런 사모님의 이야기를 대원들과 함께 나눴다. 우리가 준비한 것도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이지만 지금은 교회 실정에 맞게 교회에 맞게 우리가 준비한 것을 해야하지 않겠냐며 우리가 준비한 것은 잠시 뒤로 미루자고 말했다.

우리는 또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조율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은 신묘목사님의 일본선교 이야기 강의와 길거리 선교, 미술관 방문 등을 했습니다. 내일의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그리고 이창섭 목사님, 최민혜 사모님, 이재훈, 이재명 을 위해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