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이 고향인 어떤 형제에게>


형제님!


샘물처럼 맑은 동해바다는 언제봐도 가슴이 탁 트이고 가슴을 설레이게 하지요.
형제님 고향이 포항이시라고요?


포항 가까운 교회에 저희 둘째외삼촌이 목사님으로 시무하고 계십니다.


포항에서 북쪽 방향 첫번째 검문소인 달전 검문소에서 내려
'애도원 교회를 물어 찾아 오면 된다'
라며 사십여년전에 외삼촌께서 교회를 옮기셨다고 저더러 왔다가라고 기별하셨지요.


그때는 한창 찬미가 반주 연습을 혼자서 깨우치겠노라고 석달동안 죽기 살기로
고향교회 풍금에 매달리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다시피 여섯달 후에 아주 중요한 시험이 있는데,
그  여섯달의 반인 석달을 찬미가 반주에 매진할테니 찬미가 반주만 할 수 있게
제게 능력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찬미가 반주자로 쓰시려면 석달만에라도 깨우치게 해주세요.
그 이상은 안됩니다!!! -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기도를 한 후에 찬미가 반주에
매진하였었지요.)


그러나 혼자서 깨우치기에는 그리 만만치 않은게 찬미가 반주였습니다.
그래도 많게는 하루 열시간씩, 적게는 네시간 이상씩 열심히 기도하고 매달린 끝에
겨우 '반주의 문고리'는 잡은 것 같았습니다.
그 문고리를 돌려야 되는지 당겨야 되는지 모르는 싯점에서
외삼촌의 호출이 있었던 것입니다.

 
달전검문소에서 애도원 교회를 물었더니 검문하는 군인이 수상쩍게
한참 저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그 사람 눈치가 좀 이상하여 어리둥절 했습니다.

 
포항에서 흥해를 바라본 쪽에서 오른쪽 들판 한쪽 얕은 구릉지대에
애도원 교회가 하얀색으로 서 있었지요.


교회는 그런 분들의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는데,
정말 사모로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사명감과
이웃사랑과 끝없는 긍휼함을 지니고 계신 외숙모님이
그분들과 같이 양지쪽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갈 수록 외숙모님과 함께 서 계신 분들의
얼굴형상, 손 등이 범상치 않아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과 섞여 계시던 외숙모님이
반갑게 부르는 소리에 얼떨결에 외숙모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외숙모님과 같이 있던 분들은 제가 다가가자 다들 서둘러 집으로들 돌아갔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한센씨 병을 앓는 분들이었습니다.
(검문소에서 수상쩍게 저를 쳐다봤던 군인의 행동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마침 저녁예배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일찍 끝내고 외삼촌 내외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좀전에 보았던 그분들의 얼굴이 떠올라 자꾸만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가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제 발걸음이 자꾸만 제자리 걸음을 하였습니다.
가기 싫은 교회를 그야말로 억지로 들어섰습니다.


교회에는 풍금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몸이 불편한 분들만 있는 동네에도 누군가가 반주를 하는 가보다'
하고 약간은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분홍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집사님이
환한 미소로 풍금앞에 앉아 반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소리가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손을 움직이길래 저렇게 훌륭한 소리가 날까 궁금하여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반주를 하는 여집사님의 손을
풍금 덮개 너머로 넘겨다 보았습니다.
그순간 집사님은 손을 저고리 속으로 쑥 감추었습니다.


강대상에서 찬송을 인도하시던 외삼촌이 그런 모습을 보고
저더러 얼른 자리로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만
저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연주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탓입니다.


계속 서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반주하던 여집사님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아......


나병으로 인해 한쪽 손가락이 헐어서 고름이 나고
또다른 손가락도 닳아지려고 피가 나오고 있는 손이었습니다.
나중에 외숙모님께 들은 바로는, 병이 심한 분은 자고 일어나면
잠자리에 손가락이 그냥 떨어져 있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아픈 손으로, 남들이 말하는 천형을 받은 손으로..
그렇게 기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계셨구나....)


강한 감동과 은혜가 온 몸을 휩싸고 지나갔습니다.
뒤이어 찬바람이 부는 교회 창문 밖으로부터
강한 불덩이 하나가 제 가슴으로 들어와서 활활 타올랐습니다.
밤이라 몹시 추웠지만 난로도 때지 않아(교회재정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좀 벌벌 떨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땀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언제 끝났는지....
외삼촌과 외숙모가 제 어깨를 흔들면서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외삼촌에게 설명하기에는 그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 뜨겁고 기이했던 느낌은 지금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외삼촌이 손을 잡아 끄는 바람에 일어나 교회사택으로 와서 자리에 누웠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그래서 날씨는 매서웠습니다.
거의 잠이 들려 하는 찰나에 누군가 외숙모님을 대문 앞에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잠을 자려다 말고 외숙모님은
"집사님 추운데 얼른 들어오세요"



(아무리 인정많은 우리 외숙모님이지만 나환자를 사택으로 그냥 들이시는구나...
외사촌들이 아직 어린데 그 여린살에 나병균이 옮으면 어떡하려고.... )
저는 좀 많이 걱정이 되고 찾아온 분이 꺼려졌습니다.


"아닙니다. 실은 내일 아침에 오려고 했는데....
아까 저녁 예배때 보니 젊은 손님(저를 일컬음)이 오셨던데....
낮에 흥해장에 가서 미역을 두 오래기 샀는데, 
하나는 우리가 먹으려고 풀었고,
하나는 사모님댁에 갖다 드리려고 두 번 비닐 포장을 해달라고 해서
포장에는 손대지 않고 끈으로 묶어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가져온 가위로 끈만 좀전에 끊어 마루에 올려 놨습니다.
우리 손이 안 닿았으니 깨끗한 겁니다....
미역은 미리 담궈 놨다가 삶아야 하는 거라서 내일 아침에 오려다가
밤 늦었는데도 가져왔습니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제 눈에 더운 눈물이 마구 솟았습니다.
양계 외에는 다른 건 할 수 없는 그 분들인지라
돈 마련하기도 정상인들보다 몇배 더 어려운데
그 어렵게 번 돈으로 미역을 사왔고,
그것도 저를 위해서 이렇게 눈오고 추운 늦은 밤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좀전까지의 꺼렸던 마음이 부끄러워지는 한편으로
그 분들의 고단한 삶이 한없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목이 메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분들은 자신들의 손을 부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손이 닿지 않은 물건임으로 깨끗하다고
외숙모님에게 새삼 깨우치는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눈물을 펑펑 쏟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아까 저녁 예배때 여집사님이 진물나는 아픈 손으로 반주를 하시던
그 풍금이 대문보다 더 크게 꿈속에서 다가왔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주여!!!"
크게 외치고 제 손을 내미니 제 손도 전봇대 만큼 커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절로 찬미가 여러곡을 마구 쳤습니다.
반주가 잘 되었습니다.



깨어 일어나니 새벽 세시...
그 여집사님이 치던 건반에 나병균이 묻어 있어 내가 나병에
걸리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미가 반주만 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분들과 닭을 치며
평생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로 쫓아가 눈물 흘리며 손을 건반에 올리던
그 여집사님이 치시던 풍금을 쳐보니
역시 꿈속에서처럼 반주가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깨우친 찬미가 반주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그러나 많이 부족한 솜씨입니다.
그야말로 처음 기도 했던대로 찬미가만 겨우 치는 수준입니다.


  형제님이 포항에 계시다니 포항 가까운 흥해읍의
'애도원 교회' ,
잊지 못할 그 교회가 생각나서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청년부시절에 애도원교회에 봉사활동을 자주 나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형제님!!!
형제님의 꿋꿋한 믿음을 생각하면 정말 미덥습니다.
우리 다함께 후일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평안을 빕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