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박한 순간들>

" 누구라고? ....?  
가평에 있는 제3하사관학교에서 훈련같이 받았다고...?
아! 그래, 그래 생각난다.
하사관학교내의 교회에 같이 가기도 했었고...
어떻게 내 연락처를, 그것도 핸드폰 번호를....
이런 꿈같은 일이..... 헤어진 지 30년이나 지났는데...
나는 잘 지내고 있지. 여긴 텍사스의 작은 시골마을이야.
한인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어.. 홍하사는 어디서 뭘하고 지내는 거야?..."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도 시키지 않고
2주일동안 작업만 죽자하고 시키던 어느날 밤,
우리들을 연병장에 다 모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하사관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니 각오들을 단단히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무조건 기차를 타라고 하여
몇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가평이었다.

6개월동안 조그마한 틈도 없이 연일 꽉 짜여진
훈련일정으로 정신없이 날들이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정말 무지막지한 훈련이었다.
그래도 어김없이 밤낮이 바뀌어 봄이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어
훈련기간으로 정해진 여섯달이 다 되어 가던 어느날이었다.

훈련생들 앞에 이른바 상호평가(혹은 절대평가)라는
좀 묘한 설문지가 나뉘어 졌다.
훈련생들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는 좀 전근대적인 방법이었는데,
가장 모범적인 훈련생 하나와 하사관으로서의 품위가 없는
훈련생 하나를 적어내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그 순간이 그렇게 급박한 순간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그냥 별 생각없이 구령을 잘 하고 건실해 보이는
훈련병 하나를 모범생으로 적고,
화를 잘 내는 훈련생 하나를 품위없는 란에 적어 내었었다.

그렇게 해서 상호평가시간이 끝났는데,
잠시 후에 훈련병 하나가 중대장의 호출을 받았다.
행정실로 부터 고함소리, 얼차례(기합)받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무리 군대라지만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나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훈련병들에게는 까마득 높아 보이는 중대장에게
그런 용감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는데,
상호평가지의 평가란을 공란으로 제출한 그는 중대장의 퇴교 위협까지
섞인 엄한 설득에도 담대하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사관이 되기 위한 갖가지 훈련과정 중에 도중에 하나라도 견뎌내지 못하면 퇴교조치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등병계급장을 달고 바로 자대배치를 받게 되는,
그 당시 하사관 후보생들이 가장 수모로 여겨지던 그런 제도였다.  

뼈를 깎는 듯한 여섯달간의 훈련은 보름 후면 끝이 나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의 힘든 훈련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그런 급박한 상황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힘없는 훈련병이었던
그가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지닌 굳건한 믿음에 고개가 숙여졌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나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한참동안 격노한 중대장에게 기합과 꾸중을 듣던 그를 구해준 것은
우리보다 먼저 입대하여 하사관 훈련을 받은 박내무반장(지금은 광주의
한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이었다.
박내무반장은 훈련병이 자신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자,
다시 중대장을 잘 설득하여 상호평가문제를 없던 일로 잘 마무리 하였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나서 그는 우리들 중에서 갑자기 커보였다.

그리고 오랜 기간동안의 훈련을 무사히 마친 훈련병들은
어깨위에 녹색 견장을 달고 모자와 명찰옆에 하사계급장을
붙이고 하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자대에 가기전, 일주일간의 특별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하사가 되었다는 생각에 다들 들뜬 기분으로 서로의 연락처를 적고
어쩌고 하는 일은 생각들을 못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커보였던 그가 가끔 생각나 행방을 수소문하였는데,
이민갔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래서 그만 찾는 것을 포기하였는데,
세월이 더 흐르기전에 그를 찾아 그때 그가 했던 일이
얼마나 내게는 큰 일로 여겨졌었는지를 알려주고 싶어
며칠전에 아예 작정을 하고 그를 찾아 보았는데,
여러가지 어려운 경로를 거쳐 그가 미국 텍사스의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비록 전화통화였지만 참으로 반가운 만남이었다.

급박한 순간에도 뚜렷한 주관을 지닌 믿음으로 일관한 그는
진실하고도 훌륭한 목회를 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지 않은 그는 훗날 천국에 가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리라.

"잘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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